
안녕하세요
다들 조선 후기가 식량문제로 고통 받았다는건 다들 잘 알텐데
왜 그런지, 뭐가 원인이었는지는 그냥 두루뭉실하게
탐관오리 때문이었음
그냥 조정이 나쁜놈들이었음
뭐 이런식인데
사실 또 틀린건 아닌데
단순히 이렇게 넘어가면 재미없으니
우리 좀더 왜 이런 꼬라지가 된건지 더 심도있게 파고 들어가봐요

그럼 이야기 속으로 휘비고 디비고 레츠고~

조선 후기 식량난을 그냥 쌀이 부족해서 굶었다고 하면 설명이 너무 단순합니다
물론 흉년 들면 생산량 자체가 줄어드는 건 맞습니다
근데 진짜 문제는
전국 어딘가에는 곡식이 있는데,
그 곡식이 필요한 지역과 필요한 사람한테 제때 못 가는 상황이 자주 터졌다는 거죠
쉽게 말하면 조선 후기 식량 문제는 흑흑 쌀이 없음 굶어가 아니라
창고, 유통, 행정, 가격, 빚 문제가 한꺼번에 꼬인
그러니까 식량 행정 시스템의 마비를 보여주는 케이스 였습니다

18세기 조선은 그래도 식량관련 행정 시스템이 어느 정도 제대로 굴러갔습니다
대표 장치가 환곡인데요
환곡은 쉽게 말해 관청이 운영하는 공공 쌀 대출입니다
봄이 되면 백성들이 전년도 수확한 곡식을 거의 다 먹고
새 곡식은 아직 안 나오는 춘궁기가 오는데,
이때 관청 창고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 추수 뒤에 갚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원래 취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백성 굶지 말라고 만든 구휼 장치였고,
동시에 관청이 비상시에 풀 수 있는 비축미 창고 역할도 했음습니다
여기에 장시, 포구, 상인, 세곡 운송 같은 곡물 유통망도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18세기에는 관청 창고 + 지역 시장 + 상인 유통이 같이 잘 맞물려 돌아가면서
어느 정도 식량 충격을 버텼던거죠

비유하면 대충 18세기 조선은 집에 라면 박스도 쌓아두고,
동네 마트도 돌아가고,
택배도 어느 정도 오는 상태였습니다
완벽한 현대식 물류는 아니어도,
굶어죽기 전에 버틸 장치가 몇 개 있었던거죠
어느 지역이 부족하면 창고에서 풀고,
창고가 부족하면 다른 지역에서 사오고,
흉년이 심하면 국가가 진휼을 시도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물류도 창고도 없는 원시 미개 우가우가 농업국처럼 보면 좀 상황이 틀립니다
사실 진짜 문제는 이 시스템이 19세기로 갈수록 점점 망가져가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터진 건 환곡의 변질입니다
원래 환곡은 배고프면 쌀 빌려줄게였는데,
후기로 갈수록 쌀 빌렸지? 이자 내라 쪽으로 변합니다
환곡에는 모곡이라는 이자 비슷한 게 붙었는데,
이게 점점 지방 관청의 수입원이 되어버린거죠
백성을 살리기 위해 창고를 여는 게 아니라, 관청 운영비 뽑아내는 세금처럼 쓰이게 되었고
쌀 안빌리거나, 억지로 쌀을 떠넘겨서 모곡을 받아내는 행위들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탐관오리들은 덤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장부미스매칭 입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데요
환곡은 백성이 빌린 쌀을 가을에 갚아야 합니다
근데 흉년이 들면 백성이 당연히 못 갚죠?
여기서 관청은 선택해야 했습니다
1. 못 받을 쌀은 못 받는다고 인정하고 손실 처리할 것인가?
2. 일단 장부에는 받을 쌀로 계속 남겨둘 것인가?
후자로 가면 서류상으로는 멀쩡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백성에게 100석을 빌려줬는데 40석밖에 못 갚았다고 가정해보죠
나머지 60석을 탕감하지 않고 나중에 받을 예정으로 남겨두면 장부에는 아직 60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 창고에는 그 쌀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종이에만 존재하는 쌀, 즉 장부쌀 입니다

이게 왜 치명적이냐면, 평소에는 안 들킵니다
문서에는 우리 고을 환곡 재고 있음 이렇게 적혀 있지만
흉년이 와서 진짜로 창고를 열어야 할 때가 오면? 창고에는 쌀이 없는거죠
장부에는 있는데 현실에는 없습니다
사람은 종이에 적힌 쌀을 끓여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환곡 시스템이 겉보기에는 살아 있는데 실제 구휼 능력은 제로인 상태가 된거죠
이때 관청은 부족분을 메우려고 또 백성한테 더 걷거나,
이자곡을 더 압박하거나,
억지 징수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환곡은 백성 살리는 제도가 아니라
백성 등골 빼서 빈 창고 메꾸는 제도가 되는거죠

여기서
정퇴와 탕감
도 중요한데요
정퇴는 갚는 날짜 미뤄줌 이고,
탕감은 못 갚는 빚 깎아줌입니다
이걸 무조건 많이 해줘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핵심은
장부와 현실을 맞춰야 한다
는 거죠
못 받을 쌀을 계속 받을 쌀처럼 적어두면 관청 장부는 멀쩡하지만
현실은 창고가 텅텅 비어있는거죠
탕감은 손실을 인정하는 거고,
정퇴는 납부를 미루는 건데,
이걸 현실에 맞게 처리하지 못하면 미수금만 쌓이고 장부쌀만 늘어나게 됩니다

자 그럼 여기까지 왔으면 당연히
병신임? 쌀 걍 사면 그만 아님? 이럴텐데요
여기에 연쇄로 터지는게 방곡입니다
방곡은 쉽게 말해 곡물 반출 금지인데요
어떤 지역에 흉년이 들었는데 창고가 비었으면 원래는 다른 지역에서 쌀을 사와야 합니다
그런데 19세기로 갈수록 각 지역도 불안해지고
우리 쌀 밖으로 나가면 우리도 굶는 거 아님?
상인들이 쌀 빼가서 가격 장난치는 거 아님?
이런 불안 때문에 지방에서 곡식 반출을 막아버립니다
그러면 쌀 있는 지역은 못 팔고,
쌀 없는 지역은 못 사고,
상인은 괜히 막힐까 봐 거래를 꺼리고,
쌀부족 지역의 쌀값은 더 뜁니다
창고가 비었으면 유통이라도 살아야 하는데,
유통까지 막히는 거죠

이게 조선 후기 식량난의 핵심 구조입니다
1. 창고가 불안해지니까 지역들이 쌀을 잠금
2. 지역들이 쌀을 잠그니까 유통이 막힘
3. 유통이 막히니까 쌀부족 지역은 쌀값이 오르고 더 굶는 악순환이 생김
그러니까 전국 총생산량이 충분했냐 부족했냐만 사실 완벽한 설명은 아닌거죠
중요한 건 쌀이 어디에 있었고, 누가 살 수 있었고, 운송될 수 있느냐 없느냐, 관청이 풀 수 있었느냐 인거죠
시장에 쌀이 있어도 가격이 폭등하면 빈민은 못삽니다

지방 재정 문제도 컸는데요
사회가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조선 후기 지방 관청은 돈이 점점 더 필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세금 체계가 현대처럼 깔끔하지 않으니까 환곡 이자나 각종 부가 징수에 기대는 일이 커집니다
그러면 관청 입장에서는 환곡을 탕감하기가 싫어집니다
백성 입장에서는 님 그거 우리 못 갚겠음 인데,
관청 입장에서는 그거 깎아주면 우리 재정 구멍남 이자 받아야됨 상태가 되는 거죠
사실상 복지 제도가 지방 재정 빨대가 된 셈입니다

19세기 식량난을 전부 유통 탓으로 돌리면 그것도 틀리긴 합니다
흉년은 실제로 있었고, 가뭄,홍수,냉해 같은 자연재해가 오면 생산량 자체가 줄었습니다
다만 생산량이 줄었을 때 국가가 비축미를 풀고,
상인 유통이 움직이고,
지역 간 곡물 이동이 가능하고,
가난한 사람이 살 수 있게 가격을 완충하면 피해는 당연히 줄어듭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이 완충 장치들이 삐걱거리면서 문제가 커진거죠

18세기에는 환곡 창고가 어느 정도 실제 재고를 갖고 있었고,
지역 간 곡물 교역도 움직였고,
국가와 지방이 아직 컨트롤할 힘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습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창고와 시장이 서로 받쳐줬습니다
창고가 급한 불을 끄고,
시장이 지역 차이를 메우고,
환곡이 춘궁기를 넘기는 식으로 시스템이 돌아간거죠
그런데 19세기에는
환곡이 복지에서 세금처럼 변하고,
실제 창고 재고는 줄고,
장부쌀은 늘고,
지방 관청은 환곡 이자에 매달리고,
지역들은 불안해서 방곡을 걸고,
그렇기에 흉년 충격을 직격으로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 후기 식량난은 단순한 쌀 부족이 아니라
식량 행정 시스템의 붕괴였습니다
쌀이 있어도 필요한 곳으로 못 가고,
창고가 있어도 실제로 비어 있고,
시스템이 있어도 구제가 아니라 수탈로 작동하는 상황이 된거죠
관련 논문은

추천드리고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좆노잼글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결론:
탐관오리 + 복지 시스템으로 끝나야할 환곡이 지방 재정까지 책임지면서
각각 지방에서 빚을 감당못하면서 행정망도 같이 박살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