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고려인 음식이 퍼진 경로에 대해서 알아봐요

고려인 음식문화..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큰 영향을 줬다는건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 과정에 대해선 사실 우린 잘 모르기도 합니다

보통 고려인 음식이 소련에 퍼진 과정을 이렇게 생각하죠

1.고려인들이 김치나 나물을 만들어 먹음

2.러시아인이 한입 먹어봄

3. 오 맛있네?

4. 소련 전역에 퍼짐

물론 이런 개인적인 음식 교류도 있었겠지만,

이것만으로는 모스크바부터 우크라이나,벨라루스까지

고려인 음식이 퍼진 경로까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엔 좀 더 복잡한 과정이 있죠

고려인들은 직접 채소를 재배했고,

수확한 채소를 도시로 운송했고,

친척들이 그것을 무침,절임,샐러드로 가공했으며, 다시 시장 좌판에서 팔았습니다

산지 계약재배

공동 작업반

물류 운송

반찬 가공

재래시장 소매

이걸 다했다 보면 되겠습니다

이번엔 고려인 음식이 퍼진 경로에 대해서 한번 엿보는 시간을 가져보죠

휘비고~ 디비고~ 레츠고~렛미고~아미고~ 역사속으로~

1937년 8월 21일 소련 당국은 극동 변경지대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9월 말부터 연말까지 약 17만 2천 명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화물열차에 태워졌고,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도 제대로 된 주택이 없어서 토굴이나 갈대 움집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거주지와 이동의 자유도 제한됐고, 마음대로 다른 도시나 공화국으로 옮겨갈 수 없었죠

1940년 1월까지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고려인 2만 1459가구 가운데 2만 87가구가 정착 배치를 받았는데,

이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새로 조직된 콜호즈

기존 콜호즈

솝호즈

공업기업소

콜호즈는 집단농장, 솝호즈는 국영농장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초기 생활은 처참했지만,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의 벼농사,면화농업과 각종 관개농업에 적응하기 시작했죠

특히 극동 시절부터 쌓아 온 벼농사 경험, 세밀한 물 관리, 공동노동 방식이 중앙아시아 농업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쟁기에는 노동군과 후방노동에도 동원됐지만,

한편으로는 농업 생산성을 인정받으며 소련 안에서 이른바 농사를 잘하는 민족이라는 이미지도 생기게 됩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일부 고려인 농장은 높은 생산량으로 이름을 알렸고 노동영웅도 다수 배출했죠

고려인 음식 확산을 이해하려면 먼저 '고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고본질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농번기에 작업반을 만들어 원래 거주지를 떠난 뒤,

다른 지역의 농지를 임차하여 농사를 짓고 수익금을 가지고 돌아오는 영농 방식이라 보면 됩니다

쉽게 예시를 들어서 설명해 볼까요?

1.봄이 되면 가족,친척,동향 사람들끼리 작업반을 만듦

2.농사지을 만한 다른 지역을 물색함

3.콜호즈나 솝호즈 등에서 토지를 임차함

4.현지에 임시 숙소를 만들고 몇 달간 농사를 지음

5.수확물을 국가기관이나 시장에 판매함

6.농번기가 끝나면 본래 거주지로 돌아감

소련식 계획경제 안에서 돌아간 이동형 임차농업+계절 사업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고본질은 1950년대 중반, 스탈린 사후 거주,이동 제한이 완화되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고려인들이 소련 각지로 재분산되면서 규모가 커졌죠

고본질은 대체로 브리가다라는 작업반 단위로 움직였습니다

브리가다는 러시아어로 작업대 작업반이라는 뜻인데,

고려인 고본질 브리가다의 규모를 대체로 40~50명에서 많게는 100명 정도로 였습니다

운영 방식은 여러 가족이 결합한 준협동조직에 가까웠죠

한 연구 사례에서는 브리가다가 30헥타르의 농지를 빌린 뒤,

참여 가족들이 평균 3헥타르 정도씩 맡아 농사짓는 형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족별 담당 구역은 나뉘지만 관개시설 설치, 운송, 농자재 조달, 시장 판매 등은 공동으로 처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브리가다 지도자는 단순히 작업 지시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 어느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지 선정

2. 콜호즈,솝호즈와 토지 임차 협상

3. 관개용수 확보

4. 종자,비료,농기구 조달

5. 임시 숙소 마련

6. 수확 일정 관리

7. 트럭과 운송수단 확보

8. 판매처와 시장 좌판 물색

9. 경찰, 행정기관의 서류 검사 대응

10. 수익 분배

즉, 고본질은 단순히 농사 지었다가 아니라 밭의 토질, 물, 도로, 도시와의 거리, 최종 판매시장까지 계산한 이동형 사업이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브리가다 지도자는 농장주, 현장소장, 구매담당자, 물류관리자, 영업책임자를 혼자 겸한 셈이죠

초기 고려인 농업에서는 쌀이 중요한 작물이었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고본질 브리가다의 중심 품목이

점차 채소,과채류로 바뀌었습니다

대략 리스트를 보자면

양파

오이

토마토

가지

고추

멜론

수박

이정도 겠네요

왜 하필 채소였느냐?

1. 소련의 대규모 집단농장의 약한 부분을 파고 들었습니다

콜호즈와 솝호즈는 밀이나 면화처럼 넓은 면적에서 기계로 재배하는 작물에는 유리했지만

반면 채소는 물 주기, 김매기, 선별, 수확 시기 조절처럼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한 작물이죠

고려인 작업반은 가족 단위의 집중노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틈을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2. 고려인들의 세밀한 물 관리와 노동집약적 농법이 잘 맞았습니다

중앙아시아와 남부 소련에서 채소농사를 지으려면 관개시설이 중요합니다

물길을 관리하고 잡초를 제거하며 적절한 시기에 수확해야 상품성이 유지되죠

이 부분에서 고려인들이 어드밴티지를 얻기 쉬웠습니다

3. 도시시장에서 현금화하기 쉬웠음

곡물은 국가 수매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지만,

채소는 일부를 가족 몫으로 확보한 뒤 콜호즈 시장이나 시영 소매시장에서 직접 팔 수 있었습니다

특히 양파,오이,토마토,가지 같은 품목은 가정에서 바로 먹을 수도 있고,

절임,샐러드,무침으로 가공해 부가가치를 높일 수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같은 채소라도 다음처럼 여러 단계에서 돈을 만들 수 있었던 거죠

1. 생채소 판매

2. 선별,포장 판매

3. 절임,무침 가공

4. 시장 반찬 판매

5. 식당 메뉴화

4. 가족노동과 친족망을 활용하기 좋았습니다

고본질은 임금노동자만 고용하는 기업형 농장이라기보다

가족 구성원들의 역할을 나눠 움직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대체로 남성들이 밭과 도시 사이에서 채소를 운송하고 하역,소량도매를 담당했으며,

여성들이 시장 좌판에서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고

규모가 커지면 현지 여성이나 학생을 일당 노동자로 고용해 양파 수확,선별,포장 등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소련에서 채소를 많이 생산했다고 자동으로 돈을 버는 것은 아니건 당연하겠죠?

수확물 일부는 국가 수매가격으로 넘기거나 채소 저장시설에 판매했지만,

더 높은 수익을 얻으려면 콜호즈 시장이나 도시 소매시장에서 직접 팔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시장 좌판 자리 확보 경쟁

운송허가와 서류

경찰의 화물 검사

가격 통제

도시까지의 장거리 운송

상하기 쉬운 채소의 보관

중간상인과의 가격 협상

그래서 고려인들은 여러 판매 방식을 병행했는데요

직접 시장 자리를 확보해 소매하기도 하고,

이미 좌판을 가진 상인에게 낮은 가격으로 넘기기도 했습니다

행정규제가 지나치게 까다로운 지역에서는

비공식적이거나 반합법적인 운송,거래 방식도 사용했구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본질이 단순한 생산조직이 아니었다는 점 입니다

1.브리가다에서 채소 생산

2. 가족이 수확,선별

3. 남성 친족이 도시 운송

4. 도시의 여성,친척이 시장 판매

5. 남은 채소를 절임,무침으로 가공

6. 다시 시장과 식당에서 판매

이렇게 생산자와 판매자가 친족망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중간 유통망이 부족하거나 개판인 소련 경제에서

이 친족 네트워크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로 믿을 수 있으니 외상거래와 수익분배가 비교적 쉬웠고,

다른 도시로 먼저 이동한 친척이 시장 정보와 거주 공간을 제공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본질을 그냥 출장 농사라고 번역하면 좀 애매하고

실제로는 계절농업+친족물류+민족상업망이 결합한 단어..라고 보는게 좀더 맞겠습니다

스탈린 사후인 1950년대 중반부터 거주,이동 제한이 완화됐고,

1960년대 이후 고려인들의 도시 이동이 본격화됩니다

학생, 기술자, 노동자, 전문직 종사자들이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죠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이우

오데사

카잔

민스크

도시에 먼저 정착한 친척은 다음 역할을 할 수 있었죠

시장 자리와 판매정보 확보

농촌에서 올라온 가족에게 숙소 제공

채소 보관과 가공

반찬,샐러드 제조

소매상이나 식당과 연결

도시 소비자의 취향 전달

반대로 농촌의 고본질 브리가다는 도시 친척에게 신선한 채소를 계속 공급했구요

즉, 한쪽은 생산기지이고 다른 한쪽은 도시 판매,가공 거점이었습니다

이 둘이 연결되면서 소련 여러 도시 사이에 유통망이 생긴 거죠

간단하게 우크라이나 예시를 볼까요 ?

헤르손과 미콜라이우 일대에서는 고려인 가족들이 여름철에 채소 재배하면

이 채소들은 생산지 근처에서만 소비된 게 아니라 키이우,오데사,하르키우,리비우 같은 대도시로 보내졌습니다

도시에는 이미 고려인 친척과 동향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농촌에서 올라온 채소를 그대로 팔기도 했지만, 일부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가공했습니다

당근샐러드

가지샐러드

오이무침

절임채소

김치류

각종 샐러드

농민이 도시 상인에게 채소를 넘긴 게 아니라,

생산지의 고려인 가족과 소비지의 고려인 가족 사이에 가공 분업이 형성되어 있었다 봐야겠죠

음식 확산에서 시장 좌판이 특히 중요했습니다

시장에서는 완성된 고려인식 샐러드를 소량으로 사 먹을 수 있었고,

식당에서 비싼 돈을 내고 낯선 민족음식을 주문하는 것보다 진입장벽이 낮았죠

현지 소비자는 처음에는 고려인 상인에게 완성된 반찬을 구매하고

그러다가 맛에 익숙해지면 주변 사람에게 조리법을 묻거나,

비슷한 재료로 집에서 직접 만들어 보게 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고려인 음식이 잘 퍼진 데에는 맛의 호환성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등 동슬라브권에도 식초를 넣은 차가운 채소샐러드를 먹는등

한국의 채소 소비와 비슷한 방식의 채소 소비 문화가 있었고

고려인식 무침의 주요 구성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매운맛이나 특정 향신료는 새로웠겠지만, 음식의 기본 구조 자체는 현지인에게 완전히 외계 음식이 아니었던 거죠

예를 들어 고려인식 당근무침은 조금 맵고 향이 강한 채소샐러드로 받아들일수 있었던거죠

고려인 역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음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즈벡의 플로프 입니다

플로프는 쌀, 고기, 당근, 양파 등을 함께 익히는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음식인데,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가정식과 행사음식으로도 자주 먹는 음식입니다

오늘날 국가가 음식을 해외에 알릴 때는 보통 식당, 방송, 관광, 프랜차이즈를 떠올리는데

그런데 고려인 음식의 확산은 거의 반대 방향 이었습니다

1.농촌에서 채소를 생산하고

2.시장에서 저렴하게 판매하고

3.소비자가 일상적으로 구매하게 되고

4.가정에서 따라 만들게 되고

5. 그 뒤에 식당 메뉴로 정착하게됨

즉, 고려인 음식은 고오급 민족요리로 먼저 소개된 것이 아니라

시장 반찬과 가정식으로 아래에서부터 퍼진거였죠

보시면 알겠지만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고려인의 음식이 퍼진 경로에는

그만큼 살아남기위해서 고생하고 노력하던 고려인들의 삶이 담겨 있지 않나..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개좆노잼 똥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273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239

https://docs.historyrussia.org/ru/nodes/165250-postanovlenie-soveta-narodnyh-komissarov-soyuza-ssr-i-tsentralnogo-komiteta-vkp-b-o-vyselenii-koreyskogo-naseleniya-pogranichnyh-rayonov-dalnevostochnogo-kraya-21-avgusta-1937-g

https://db.history.go.kr/download.do?fileName=kn_103_0040.pdf&levelId=kn_103_0040

https://scholarworks.bwise.kr/hanyang/bitstream/2021.sw.hanyang/155530/1/KCI_FI002173716.pdf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95093878_Kimchi_seaweed_and_seasoned_carrot_in_the_Soviet_culinary_culture_the_spread_of_Korean_food_in_the_Soviet_Union_and_Korean_diaspora

https://ojkum.editorum.ru/en/nauka/article/122319/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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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5
새우젓이 안들어가는 당근 김치를 김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파오차이에 더 가까울 듯
ㅇㅇ •
재밌고 유익한데 다른 쇼츠충이 퍼갈거 생각하면 내가 눈물이 다 난다 아예 유튜브 하나 파보는거 어떰
실베 •
오히려 특별하지않아져서 비추함이미 ai짤 우려내서 생활역사강의하는 떠중이들많음
ㅇㅇ •
조선족부터 고려인 재미교포 재일교포 그리고 북한 주민까지 전부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민졷
ㅇㅇ •
맛있는게 아니라 땅이 척박하니 먹을껄 겁나 비튼거지한식나물 역사도 그래
ㅇㅇ •
애초에 쟤들이 연해주에 있던게 일본이 땅뺏고 쌀뺏어가서 연해주로 온건데 일본에 점령당한게 나음 ㅇㅈㄹ ㅋㅋㅋㅋ
ㅇㅇ •
선족보다야 나음이게 노가다 같이 일해보면 앎일해보면 선족이는 지들 불필요할때는 중국인거리다가지들 피해보거나 어디 아파서 한국병원갈때야자기 한국인이다 거림 반대로 고려인은 그냥 뿌리랑 정체성을 한국으로봄시선의 차이가 두개종족이 아예다름
ㅇㅇ •
고려인 vs 조선족고려인의 46% 이상이 제조업에 종사하며, 임금 근로자의 월평균 세후 임금은 약 337만 원 수준으로 조선족 보다 높은 편고려인: 카자흐스탄이나 러시아에서 올리가르히 재벌로 나름 영향력조선족: 경제자본-정치자본-문화자본 영향력 zero고려인 승
ㅇㅇ •
참고로 지금도 저짝 고려인들 후손 남아서 러시아군에도 엄씨 가진 놈 장교까지 올라갔나 했고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 미콜라이우주 주지사가 김씨 고려인임 비탈리 킴?
ㅇㅇ •
1937년 연해주의 한인들은 집단 농장의 우수한 결과를 내고 있었음.버려진 척박한 땅에서 쌀과 어업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이주민들이 지주 계급이 아니어서 자기 땅이라고 열심히 개간한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싶음.이런 결과를 내자 스탈린등 수뇌부는 고려인이 중국이나 일본인과 혼동되며 간첩활동을 할수있다는 누명을 씌워 9월말에서 10월 25일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태워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이동 열차안에서 수천명이 사망
ㅇㅇ •
스탈린이 민족학의 대가임. 학문적으로 따져도 월클급한민족의 기원이 중앙아시아라 있던데로 보낸것뿐이다
ㅇㅇ •
무가 굳이 중앙아시아에 없었다는게 이해가 안되네 추위에 약한 채소도 아니고 왜 무를 쓸수 없었을까?
ㅇㅇ •
말이 고려인이지 조선인들인데 전 세계에 가장 먼저 이름을 알린 시기가 고려라 고려인이라고 불리는거지사실 지금 우리도 KOREA 가 고려에서 온 말이라 따지고 보면 korean은 고려인임
ㅇㅇ •
한족들 동남아 화교들과 서로 도우며 사업할때조선족들은 사기치기 바빴지그뒤로 아무도 조선족을 뽑지도 않고 요직에 앉히지도 않게 됐어
ㅇㅇ •
1990년 소련 붕괴까지 일어나자 혼란스러운 명칭 논란 속에서 러시아 정부(옐친 정권)또한 친한 정책을 펼쳤다. 모든 고려인들이 러시아 지역에 거주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소련 붕괴 이후에도 러시아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93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조선인대표자회의'에서 재소련 조선인의 명칭을 남한과 북조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고려인으로 공식 통일하였으며 이후 소련권의 동포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_ 정치적으로 북 조선인민공화국이랑 안 엮이려고 중립적인 명칭을 선택했대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