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만든 두부

새끼줄에 묶어내도 안부서지는 단단한 두부

샤브샤브에 담가먹기 딱 좋다고 한다.

대창전골을 해주는 사장님

전골요리에 아주 제격이라고

이후 촬영을 마치고 송별파티를 여는데

알고 보니 박호인의 23대손이 고치현에서 살고있었다.

후손은 선조가 만들었던 당인두부가 재현된줄 몰랐고

당인두부 공장 사장은 그 후손이 곁에 같이 살고 있는 줄 몰랐다.

이 기회로 처음만난 두 사람

당인두부

우리의 아픈 역사

1670
댓글 16
내 할매가 이비이비 하더니, 저개새키들 만행인걸 알고 저개새키들 개박살 내기로 결정함 김일성 개새키도 마찬가지임
이딸 •
박호일은 그 후에 온 조선통신사따라서 조선으로 돌아갔음저 사람은 박호일 돌아갈 때일본에 남은 아들의 후손임
ㅇㅇ •
포르투갈에 팔려온 중국인 노예들 가운데 유난히 ‘안토니우’라는 이름이 많다."왜구에 의한 중국 연안 지역 약탈과 아시아 지역에서의 인신매매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당시 동아시아 해역에서 막 교역을 시작한 유럽인도 그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출신 노예의 행동 범위가 글로벌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예컨대 한 중국인 여성은 왜구에 의해 일본에 끌려가 포르투갈인에 팔렸다. 빅토리아 디아스라는 이름을 받은 그녀는 이후 말라카, 고아, 리스본을 거쳐 앤트워프, 함부르크에서 살았다
ㅇㅇ •
지금 한국과 일본중에 어디가 더 살기좋냐는 이견이있을 수 있지만저당시 개조센과 일본은 이방인 디버프 달고도 일본이 더 살기 좋았던게 사실임민비의 개지랄을 등에 업은 고부군수 조병갑때문에 동학농민운동 일어나고 스노우볼이 굴러가서 청일전쟁,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병크의 시대였는데저때 90% 평민노예들의 삶은 그냥 지옥이었음일본 부라쿠민들이 해방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과 유사한거임멸시받는 부라쿠민급으로 보통의 조선인이 조선땅에서 살기가 팍팍했던거지
ㅇㅇ •
조선의 두부는 명나라에도 수요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영락제나 선덕제는 조선인 기술자를 데려갔고, 임진왜란 태 온 원군들도 짬밥에 두부는 꼭 들어갔다고 한다
ㅇㅇ •
단단하면 곤약같은 느낌이겠네 그럼 샤브샤브에 잘 어울릴듯나는 어제 샤브샤브 먹는데 두부넣길래 먹어보니 이걸 왜 넣어 했는데
ㅇㅇ •
조선에서 천시받던 각종 기술자들 일본에 끌려가서 오히려 잘먹고 잘살았다는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ㅇㅇ •
이거 단단한 게 아니고 치즈같이 탄성이 있는 두부임모짜렐라같은 느낌 ㅇㅇ국물에 넣는 순간 국물 다 빨아들임
붉은 •
세상의 모든 재료와 기술은 편중을 두고 흩어져 있고, 해운의 거리당 운임은 육상 운송의 1/60 이며, 귀한것은 비싸고, 흔한것은 값이 싸다. 세가지 명제로 내릴수 있는 결론은 바다로 진출하지 않는 문명은 바다를 건너온 이들에게 반드시 패망함
ㅇㅇ •
시코쿠에 한반도 유민들 많이 흘러들어 갔음. 일제 때 일본유학간 반도인들을 유야무야 많이 도와줬다 함.글구 콩은 원래 한반도가 원산지여, 중국이 원조라고 개소리하는 것들아. 된장기원도 춘장이라고 할 태세일세
FF •
아픈역사가 아니라 기쁜역사 아님?ㅋㅋㅋ두부나 만들던 놈들이 조선에서 대접받았을리가 없잖아ㅋㅋㅋ
ㅇㅇ •
아픈 역사가 아니라 도자기 장인이라던가 기술자 천민이라고 박대하다가일본으로 다 뺏긴거지 ㅋㅋ안돌아감 수구 하고 일본에 자리잡음현명한 조상님들은 다 일본에 갓다
ㅇㅇ •
23대손이라는 건 족보가 있었다는 건데 당시 양인 이하는 족보를 남길 수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즉 일본으로 건너가셔서 계급이 상향됐다는 거겠죠
ㅇㅇ •
포로 송환하러 간 조선관리 왈 데려 오려고 해도 안가려고 하는 자들이 많아 통탄스럽다 라고 함
ㅇㅇ •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인식하고 있었다.조선 조정도 보내기 전에 이걸 우려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시즌2를 막고 싶어서 걍 어쩔 수 없이 보낸 거임.나중에 실제로 일본에서 '속국 사절'로 인식되고 있는 걸 알았지만 그냥 모른체 함.동아시아 약소국의 비애인 것임
ㅇㅇ •
[언중언]`조공(朝貢)'입력 2018.10.04. 오전 12:33강원일보 박종홍 논설위원조선통신사는 조선이 일본 막부에 보냈던 외교 사절이다. 1413년부터 약 400년간 20차례 파견했다. 파견 인원은 400~5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대규모 행차에 일본 전역이 들썩였다. 거창한 조선의 사신 행렬은 당시 최대의 볼거리였다. 일본은 사절단을 `섬이 가라앉을 정도'로 성대히 맞았다. 일본에선 조선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선전하면서 국가적 자부심을 높이려는 속셈이 있었다
ㅇ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