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정산하다가 영수증 뭉치를 바닥에 와르르 쏟아버렸어요. 줍기 싫어서 3초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겨우겨우 허리 숙여 주워담았네요. 리치먼드 하늘은 오늘도 회색 물감 풀어놓은 숭늉 색깔이에요. 밴쿠버 5년 차 되니까 이제 흐린 날씨는 친구 같고 비 오는 날은 지긋지긋한 가족 같아요.
날씨가 이러니까 카페 안에 있어도 물속에 잠겨있는 기분이 드네요. 손님들은 다들 어디 가셨는지 개미 한 마리 안 보이고 커피 머신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해요. 퇴근하고 코앞 원룸 가서 씻고 누우면 딱 좋겠는데 그 몇 걸음 걷기가 싫어서 카운터에 기대서 숨만 쉬고 있어요.
창밖 나무들은 잎 다 떨어져서 앙상한데 저만 살이 포동포동 오르는 것 같네요. 겨울 타나 봐요. 만사가 귀찮고 그냥 겨울잠 자는 곰이 부러워지는 저녁이에요. 누가 저 대신 셔터 좀 내려줬으면 좋겠네요. 집에 가면 전기장판이랑 한 몸이 되어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