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진보'라는 단어 자체가 함정이라는 글을 봤는데요. 진보라고 하면 일단 발전한다는 뜻이라 반대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 단어는 토론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기고 들어간다는 게 글쓴이 주장이에요. 일종의 이름표 치트키인 셈이죠.
글쓴이는 역사부터 꺼냅니다.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모두 혁명을 인류의 다음 단계라고 홍보했대요. 더 나은 세상, 평등, 발전을 내걸고 그 대가로 자유, 재산권, 반대할 권리를 내놓으라고 했고요. 결과는 소수에게 몰린 권력, 짓밟힌 반대 목소리, 강제 집단화와 기근으로 숨진 수천만 명이었습니다. 포장지엔 발전이라고 써 있는데 뜯어보니 전혀 딴 물건이었던 거죠. 이 포장과 결과의 격차가 하고 싶은 말의 전부라고 하네요.
그러면서 BC를 스탈린에 비교하려는 건 아니라고 선을 확실히 긋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수법 얘기라는 거예요. 좋은 이름표를 앞에 걸고 결과는 나중에 보게 만드는 수법이요. 그러고는 BC NDP 얘기로 넘어가는데요, 뿌리를 따라가면 CCF라는 당이 나온대요. 1933년 이 당 선언문에 자본주의를 뿌리 뽑겠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합니다(지금 들으면 꽤 매운맛인 듯). 그 뒤로 많이 순해져서 지금은 공산당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맞대요. 다만 해법은 그대로라는 거예요. 더 큰 정부, 더 많은 지출, 더 많은 규제요.
그래서 9년 성적표를 쫙 펼쳐놨는데 숫자가 꽤 아픕니다. 가족 의사 없는 BC 주민이 130만 명 가까이 되고요. 의뢰서 받고 실제 치료까지 평균 32주가 걸린대요(반년 넘게 기다리다 병이 알아서 낫거나 더 심해지거나 둘 중 하나일 듯). 수술이나 검사 대기 명단에 있다가 한 해에 4,620명이 숨졌다고 합니다. 올해 적자는 역대 최대인 133억 달러고, 납세자가 갚아야 할 빚은 1,890억 달러를 향해 가는 중이래요. 마약 비범죄화 실험은 에비 주수상이 직접 끝내면서 효과가 없었다고 인정했고요.
글쓴이도 반론은 챙겨뒀어요. 의사 부족은 캐나다 전체 문제라는 것, 마약 사망은 작년에 줄었다는 것 다 맞는 말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래도 9년이나 운전대를 잡은 정부가 그 9년 성적표에서 쏙 빠질 순 없다는 거죠. 그분들이 좋은 뜻으로 했다고 믿지만 좋은 뜻이 결과를 대신하진 못한다고 합니다. 결론은 깔끔해요. 다음에 정치인이 "진보"라고 말하면 어떻게 들리는지 말고 무엇을 해냈는지 물어보라고요.
읽고 나니 꽤 뼈를 때리더라고요. 패밀리 닥터 구하려고 대기 명단에 이름 올려놓고 소식 없는 분들, 워크인 클리닉 앞에서 아침부터 줄 서본 분들이라면 이 숫자들이 남 얘기가 아닐 거예요. 정당 이름표가 진보든 보수든 결국 우리가 사는 건 슬로건이 아니라 결과잖아요. 의사 못 만나고 32주 기다리는 건 이념이 뭐든 똑같이 아픈 거고요. 그 점에서 '말 말고 결과로 평가하라'는 결론엔 반박할 구석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댓글도 꽤 화끈했어요. 이번 선거는 보수당이 집권할 확률이 80%라면서 진보의 탈을 쓴 정책 실패와 주민 고통을 이제 끝내야 한다는 분이 계셨고요. 그냥 "짐보!" 두 글자로 정리하신 분도 있었습니다(진보를 비튼 드립인 듯, 짧고 굵음). 요즘 한국 좌파들도 여기선 조용하다며 할 말이 없는 거 아니냐는 댓글도 달렸고요.
댓글 분위기만 보면 이미 마음 정한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다만 '진보'라는 이름표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원글 논리대로라면 '보수'라는 이름표도 똑같이 성적표로 따져야 공정하겠죠. 누가 되든 대기 32주가 줄고 패밀리 닥터 배정 문자가 오는 날이 진짜 진보 아닐까 싶네요. 투표하기 전에 공약집이랑 예전 성적표 한 번씩은 꼭 비교해 보시길요.
